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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카쿠사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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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휘를 쓰는 나루히토 천황의 조카에 대한 내용은 히사히토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일본의 제89대 천황. 지묘인 황통의 시조였다.
휘는 히사히토(久仁)였으며,[1] 고사가 덴노의 4남으로, 사이온지 깃시의 장남이었다.
2. 생애[편집]
1246년, 부친인 고사가 덴노의 뒤를 이어서 4세의 아주 어린 나이로 천황에 즉위했고, 재위하는 동안 고사가 상황이 인세이(원정)를 시행했다.
고후카쿠사 덴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는데, 이때문에 고사가 상황은 고후카쿠사 덴노의 동복동생인 쓰네히토 친왕(훗날의 가메야마 덴노)을 더욱 총애했다. 쓰네히토 친왕이 황태자로 옹립된(1258) 이듬해인 1259년 11월, 17세의 고후카쿠사 덴노가 양위한 것도 부친인 고사가 상황의 의도 때문이었다.
고후카쿠사 상황의 황자를 놔두고, 가메야마 덴노의 황자인 요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정한 것으로 볼 때 고사가 상황은 가메야마 덴노의 자손에게 황위를 계승시키고자 했던 것 같으나, 정작 황위 계승에 관한 명확한 의견을 밝히지 않고 이에 대한 결정을 가마쿠라 막부에게 위임하는 유언을 남긴채 붕어했다(1272. 2). 이에 따라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덴노 중 어느 쪽이 통치권자가 될 것인지를 두고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태후인 사이온지 깃시가 고사가 상황의 의중을 가마쿠라 막부에 전달하면서 가메야마 덴노가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처치에 깊은 불만을 가지게 된 고후카쿠사 상황은 1274년 3월 가메야마 상황의 아들인 고우다 덴노가 즉위하자, 태상천황(상황)의 칭호를 버린 후 출가하려고 결심했다. 당시 교토 조정과 가마쿠라 막부의 교섭을 각각 담당하고 있었던 사이온지 사네카네와 막부의 집권(싯켄)이었던 호조 도키무네가 고후카쿠사 상황의 처지를 동정하여 고후카쿠사 상황의 황자인 히로히토 친왕을 고우다 덴노의 황태자로 세웠다.
1287년 히로히토 친왕이 후시미 덴노로 즉위하자 고후카쿠사 상황의 인세이가 개시되었다. 이어서 후시미 덴노의 황자인 다네히토 친왕이 황태자로 정해졌고, 고후카쿠사 상황의 황자인 히사아키 친왕이 가마쿠라 막부의 제8대 쇼군이 되었다. 형세가 역전되어 고후카쿠사 상황에게 유리한 세상이 되자 가메야마 상황이 출가해버렸다.
1290년, 고후카쿠사 상황은 출가하여 법명을 ‘소지쓰’로 했다. 현재 그의 일기인 《고후카쿠사인신기》(後深草院宸記)가 전해지고 있다. 고후카쿠사 상황은 지묘인(持明院, 지명원)에 거주했기 때문에 그 혈통을 지묘인 황통이라 했고, 가메야마 상황의 자손은 고우다 덴노가 다이카쿠지(大覺寺, 대각사)에 거주했기 때문에 그 혈통을 다이카쿠지 황통이라고 했다. 이러한 황실의 분열은 난보쿠초 시대까지 이어졌다.
추호(追号)인 '고후카쿠사'(後深草)는 제54대 닌묘 덴노의 별호인 '후카쿠사노미카도'(深草帝)에서 따온 것이었다.
3. 가족 관계[편집]
- 중궁: 사이온지 기미코(西園寺公子, 1232년 ~ 1304년)
- 후궁: 도인 인시(洞院愔子)
- 후궁: 산조 후사코
- 황자: 히로히토 친왕(熈仁親王, 후시미 덴노)
- 황자: 히사아키 친왕(久明親王, 1276년 ~ 1328년, 가마쿠라 막부 제8대 쇼군)
- 황녀: 레이시 내친왕(姈子内親王, 1270년 ~ 1307년, 고우다 덴노의 비)